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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산악인 김인섭 한국산악계가 잊고 있는 진정한 산악
    산악인 인물 2015. 7. 4. 18:56









    사람과  - 2015년 07월

    산악인 김인섭 한국산악계가 잊고 있는 진정한 산악

    인물 집중탐구

    여기 한 산사나이가 있다. 71세 초노(初老)에 낙천적이며 음악과 미술을 좋아하고, 다방면으로 해박한 지식을 지닌, 영어와 인도어, 네팔어에 능통한 멋쟁이 여행가. 

    돌이켜보면 60년대와 70년대 우리나라 클라이밍 세계의 첨단을 이끌던 사람. 그러나 불운하게도 빛을 못 보고 사라진, 현존하는 산악인들에겐 오래전에 잊혀져버린 인물.

    우리 등산발전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첨예산악인 한 분을 한 치의 가식과 과장 없이 소개하고자 한다. 이 분은 필자의 고교(서울사대부고) 4년 선배다. 

    같은 보이스카우트 출신으로 필자에게 고1때 록클라이밍의 세계를 가르쳐준, 말하자면 필자의 등산 사부(師父)다. 1975년 에베레스트 정찰 40주년을 자축하기 위해 이분과 둘(당시 정찰대원)이 에베레스트 자락을 다시 찾았다.

    은벽산악회 창립과 ENSA 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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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딩의 나마스테 롯지의 여장부 주인장과 함께 한 김인섭. 그는 네팔 곳곳에 친분이 두터운 현지인이 많은 마당발이다.

    김인섭(金仁燮). 1944년생. 그가 처음 록클라이밍에 빠져든 것은 중2(1958년)때다. 한선호(전 순천향병원장) 등과 함께 김동수 선배(중앙고OB)로부터 암벽등반을 배웠다.

    이어 고1때 스노우알파인(Snow Alpine) 클럽 창립에 참여했다. 안영찬(한양대OB), 김진수(동대OB) 등 선배와 고교생으론 권오성(대신고), 황석영(경복고) 등과 함께였다. 그런데 회원들이 줄줄이 군에 입대하면서 갑자기 유명무실(有名無實)한 클럽이 됐다.

    그는 건국대 지리학과에 재학중이던 1964년에 엄광일, 이건우 등과 은벽산악회를 창립하며 후배들을 모았다. 필자도 이때 창립회원으로 참여했다. 

    당시 서울의 록클라이밍세계는 북한산 인수봉파와 도봉산 선인봉파로 나뉘었는데 그는 선인파의 대표주자 중 하나였다. 이즈음 그는 열심히 외국 산() 서적들을 읽었다. 산책에 심취할수록 등산의 무한한 세계에 빠져들었다. 어느덧 주위에서 늘 공부하는 클라이머로 유명해졌다.

    은벽산악회 회원들은 심벌마크 배지를 항시 옷에 달고 다닐 정도로 긍지가 대단했다. 1968년엔 본격적인 회지(會誌) [銀壁]을 창간했는데 내용이 진취적이고 학술적이라 주위에서 큰 호평을 받았고 이는 어쩌면 순수클라이밍 산악회지로는 첫 번째일지도 모른다.

    이어 1969년에 선인봉에 [은벽길] 코스를 개척했다. 이때 그는 새로운 수평하켄을 고안해 직접 대장간을 찾아가 제작하기도 했다.

    대망의 70년대가 되었다. 1971년 12월, 한국산악회에서 8명이 프랑스국립스키등산학교(ENSA)의 교육을 받고 돌아왔는데 이에 자극받아 과감히 모리스 엘조그 샤모니 시장(市長)에게 편지를 썼다. 

    번역은 프랑스어에 능통한 명동성당의 장익 신부(神父, 장면박사의 동생)을 찾아가 부탁했다. 장 신부님은 독일유학파에 알프스에서도 오래 공부했던 인텔리. 6개월 후 한통의 편지가 프랑스에서 날아왔다.

    발신인은 모리스 엘조그 IOC위원. 모리스 엘조그는 1950년 인류최초로 8,000미터 봉을 등정한 산악인으로 1958년부터 6년간 프랑스 청소년체육부장관(Minister of Youth & Sports)을 지낸 후 샤모니 시장으로 재직할 때다.

    1972년 8월, 그는 후배산악인 3명과 프랑스로 가서 ENSA의 [국제아마추어리더] 2주 과정을 이수했다. 이는 국내최초의 일로 당시 영국, 이태리, 그리스 등 8개국에서 48명이 함께했다.

    이어 히말라야 등반의 산증인인 도미니끄교수로부터 [고산등산학]을 10일간 연수받았다. 이후 국내 최초로 알프스 최고봉 몽블랑(4,807m)을 등정했다.

    ENSA교육을 마친 후 시몽, 밀레, 라프마 등 여러 등산장비회사를 방문했다. 이때 선진화된 서구제품에 크게 감명받고, 귀국 후 국내등산장비 현대화에 앞장설 결심을 한다. 

    귀국하자마자 그는 우선 전년도 한국산악회 팀과 달리 ENSA에서 교육받은 피켈사용법 등 신()기술을 열심히 전수(傳授)하기 시작했다. 

    마침 1971년부터 서울산악회의 겨울등산학교가 매년 1월 설악산에서 열렸는데 1973년부터 시작된 그의 강의는 새로운 빙벽등반의 혁신을 불러일으켰다. 등산잡지를 통해 암벽과 빙벽등반의 신기술 보급에도 앞장섰다.

    장비개발에 나서다

    1973년 봄, 그는 서울 종로 청계천1가에 등산장비점 [설악장(雪山莊)]을 오픈했다. 당시 외제장비는 보따리장사 수입품(?)이 대부분이고, 시장에선 미제 군용장비가 주종을 이루고, 국산 제조장비는 질적으로 매우 열악할 때다. 

    그는 등산화공장과 배낭공장 및 등산복공장을 차례차례 개업했다. 모두 시작은 수작업으로 가내공업 수준이었지만 그의 꿈은 훗날 세계최고품으로 인정받는 국산 등산장비회사 경영이었다. 현재 국산제조 1위 코오롱스포츠는 오픈도 안했을 때다. 

    당시 록클라이밍슈즈는 송림, 미성, 멜본이 대세였는데 그의 설산장 암벽화는 독특한 제조방식과 스타일로 점점 인지도가 높아졌다. 배낭도 새로운 스타일로 전문 클라이머에겐 인기 독점품목이 됐다. 그가 제작하는 등산복 중에선 윈드자켓, 닉카바지 및 젤트섹 등이 인기 있었다.

    아침에 일어나면 등산서적부터 읽기 시작하고, 이론과 실기에 해박하며, 등반장비 디자인에 늘 몰두하는 그는 이미 직업등산가였다.

    1972년에 이인정(현 대한산악연맹 회장) 등이 모래내금강 김수길 사장을 통해 국산아이젠에 혁신을 가져오자 곧바로 김수길 씨를 찾아가 샤르레모제 양날 톱니의 피켈을 모방 제작케 했던 장본인도 바로 그다. 이후 윔퍼형 텐트도 도안, 제작했다. 주문수량은 점차 늘어났다. 한 달 매출이 400만원에 달했다.

    한국등산학교 창립과 에베레스트 정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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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0년 전, 에베레스트 BC에서 김인섭(오른쪽)과 필자.

    1974년 1월 겨울등산학교가 끝나자 그는 몇 사람이 모인 자리에서 4계절을 아우르는 상설 등산학교 설립을 제안한다. 이왕이면 문교부의 정식인가 받길 원했다. 이때 그의 발언에 동조한 분이 당시 국회의원으로 서울시산악연맹 회장인 권효섭 선생이다.

    권효섭 회장과 그는 의기상투해 곧바로 등산학교 설립에 앞장섰다. 여기에 산악계 원로 안광옥 선생과 강호기, 김경배가 합류해 거부권을 행사할 수 있는 5인 발기위원으로 등산학교를 설립한다. 당시 대산련, 한산을 초월해 전국 규모의 국내 최초 상설 등산학교로, 그 학교가 바로 [한국등산학교]다. 

    나아가 그는 한국등산학교의 홍보를 위해 1974년 가을부터 ‘일간스포츠’에 매주 수요일 [등산교실]을 1년간 연재한다. 한국등산학교 이름으로 연재했지만 그 원고는 100% 그 혼자서 작성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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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0년 전, 에베레스트 원정 1차 정찰대 부대장으로 활동했던 김인섭.

    등산장비 제조, 판매와 등산학교 강의와 원고 등으로 바쁘게 산악활동을 하고 있을 1974년 말에 대한산악연맹 부회장으로 국회의원인 김영도 선생으로부터 77에베레스트 원정 훈련대의 트레이너를 맡아달라는 부탁이 왔다. 

    이듬해에 파견할 에베레스트 1차 정찰대의 부대장 직책도 함께였다. 그는 흔쾌히 받아들였고, 서서히 에베레스트에 총력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1975년은 그에게 오직 에베레스트를 위한 한 해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월과 2월의 설악산 훈련, 3월에 정찰대원 선발, 4월부터 7월까지 국내훈련과 정찰준비, 8월부터 11월 중순까지 무려 107일간 현지정찰활동, 11월의 정찰보고서 작성, 12월의 사진 및 장비전시회 등. 

    정찰대원은 모두 7명으로 각자 맡은 임무가 있었지만, 세부계획과 일본에서 장비구입, 현지일정 등 일체 기획은 그의 머리에서 나왔다. 경비행기 타고 웨스턴 쿰(Western Cum) 상공에서의 공중정찰을 제의한 것도 바로 그였다. 매사에 철두철미했고, 선견지명의 슬기로움과 예지(叡智)가 돋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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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0년 전, 캐러밴 중 카르테 마을의 상게 셰르파 집 앞에서. 왼쪽부터 필자, 고상돈, 사다 상게 부부, 김인섭 부대장, 김운영. 맨 앞 무전기를 든 젊은이는 상게의 큰아들로 정찰대에 참여했다.

    그러나 기쁨 뒤에는 슬픔이 있다고 했던가. 그가 산악인으로서의 첫 슬픔은 귀국 후에 현실로 나타났다. 네팔에 가있는 사이에 사랑했던 후배산악인들이 그의 구두공장과 배낭공장의 유능한 직원들과 정보를 빼간 것이다.

    무릇 비즈니스 세계에선 스카우트 경쟁이 다반사라지만 당시 그에겐 쇼크였다. 에베레스트 정찰활동을 하는 동안 그런 일을 일으킨 것에 배신감을 느꼈다. 그러나 어쩔 수 없지 않은가!

    다음해인 1976년 2월 설악산 훈련에서 최수남, 송준송, 전재운 세 명의 대원이 안타깝게 눈사태로 희생됐지만 이 애석한 사고는 오히려 이후 그 결의와 열정과 노력이 더욱 강화되는 계기가 됐다. 그의 두 번째 슬픔은 뜻밖에 1977년 초봄에 나타났다. 

    당시 김영도 회장 외에 가장 깊숙이 원정에 관여한 대원은 바로 그였다. 원정대 식량, 장비, 산소, 수송, 루트개척 등 실질적인 기획 초안을 직접 세운 원정대의 브레인으로 그의 역할은 자타가 공인했다. 그런데 최종 대원 선발 과정에서 뭔가 이상한 기류를 감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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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베레스트가 없었다면 아마도 인생항로가 바뀌었을지도 모르는 김인섭.

    그의 생각으론 연맹의 몇 분이 여기에 끼어드는 것은 옳지 않다고 느꼈다. 최종 선발대원 중 몇은 그로선 용납하기 어려웠다. 또한 뭔가 순수성에 의심이 들면서 등반대장 등과의 보이지 않는 알력도 느꼈다. 

    그는 고심 끝에 자신이 빠지는 것이 원정대에 도움이 되리라 확신한다. 수년 동안 그토록 노력해온 에베레스트였지만, 또 이 때문에 사업에도 타격을 입었지만 과감히 접기로 했다. 막판이라 아쉬움이 컸다.

    그러나 이는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닌 선택의 문제였다. 공공(公共)의 선을 위한 선택의 차이라 할까. 그를 애써 찾는 김영도 회장에게 벌려놓은 사업체를 핑계로 원정대에 참여가 어렵다고 거짓말을 했다. 이후 오늘날까지 원정대원 모두는 그가 사업 때문에 원정대를 떠난 것으로 알고 있지만 실은 그렇지 않다.

    홀연히 물러났지만 마음속에 어찌 원정대에 관심이 없겠는가. 원정대가 카트만두에서 대원들의 신발이 맞지 않아 새로 구입한다는 등 또 몇 가지 장비를 김주명 사무국장이 부랴부랴 일본에서 구입해 현지로 전달했다는 등의 소식이 들릴 때마다 노심초사 했다.

    원정대가 등반을 펼칠 때 그의 걱정은 단 두 가지, 아이스폴 루트의 안정성과 변덕이 심한 날씨였다. 결국 하늘의 뜻으로 원정대는 성공했다.

    하늘의 뜻이라 함은 루트개척 중에 프랑스의 산소통 13개를 발견하지 못했다면 성공이 그만큼 어려웠기 때문이다. 원정대가 성공한 날 저녁, KBS TV는 특집프로로 전국에 생방송했는데 에베레스트 전문가인 그를 특별대담자로 초청했다.

    그는 아이스폴의 안정성 유지, 잦은 변덕이 적었던 날씨, 대장의 훌륭한 지도력과 대원들의 단결력을 성공의 요인으로 꼽는다고 말했다. 그러나 정작 원정대가 국민적 영웅으로 금의환향했을 때는 나타나지 않았다.

    북극탐험 기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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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카라파타르를 오르던 중 잠시 휴식을 취하는 김인섭.

    그는 항상 새로운 도전에 심취해 왔다. 도전하는 인생이 좋았다. 에베레스트의 서글픈 중압감을 떨쳐버리려 노력하던 1977년 여름에 그의 머릿속에 새로운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좋다! 세계 3극지라는 에베레스트 본 원정엔 참여하지 않았지만 대신 제1,2의 극지로 향하자! 그는 북극과 남극 탐사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다. 현지자료를 구하는 등 실질적 기획 작업에 몰입했다. 

    국내 최초라 정보가 적어 많이 힘들었다. 먼저 북극을 선택해야 했다. 북극점은 얼음바다 위에 위치하기에 개썰매는 북극권 땅에서부터의 경험이 필요했다. 

    고심 끝에 우에무라 나오미 등과 달리 그린란드를 출발지로 기획했고, 탐사기간은 이듬해인 1978년 봄 여름으로 정했다. 육분의(六分儀Sextant) 등 천측을 전문적으로 배운 해군장교 출신도 확보했다. 어느 정도 초안이 작성되자 삼성그룹 이건희 부회장을 찾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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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누구나에게 세월이 쏜 화살 같다지만 유독 그에게는 포탄 같았을지도 모른다. 그만큼 격렬했던 시간이었다고나 할까.

    이건희 신임부회장은 그의 고교 2년 선배로 학교 때부터 잘 아는 사이다. 이건희 부회장은 고교동기 손근 이사를 불러 중앙일보에서 긍정적으로 검토할 것을 지시했다.

    그러나 대외비 기획안이 옮겨 다니더니 결국 중앙일보는 기획 당사자인 그를 무시하고 대신 에베레스트 등정으로 국민적 영웅이 된 김영도 회장을 선택한다. 그의 세 번째 슬픔의 순간이다. 오랜 노력과 집념이 뜬구름 되는 순간. 허무했다. 에베레스트는 스스로 그만두었지만 이번은 정말 억울했다. 

    그러나 달리 생각해 보면 비중 있는 김영도 회장과 대한산악연맹을 잡은 중앙일보를 이해 못할 바도 아니었다. 어차피 세상이치가 그런데…… 미약한 그 자신을 원망할밖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앙일보가 미웠다. 하염없이 눈물만 쏟아졌다.

    한편 김영도 회장은 에베레스트 대원중에서 몇몇 대원들로 북극원정대를 구성했다. 필자는 이번 40주년 기념트레킹에서 눈 내리는 어느 날 문득 그에게 물었다. 

    “만일 그때 김영도 회장이 형과 손잡았다면 어땠을까?” 그는 자신 있게 대답했다. “그랬으면 결코 북위 80도 2분에서 끝나지 않고 훨씬 더 올라갔을 것이다.”라고. 어느덧 70넘은 노인(?)이 된 그에게 이미 38년 전의 미련은 남아있지 않은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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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0년 전, 루트를 살펴보는 에베레스트 원정 정찰대 김인섭 부대장.

    그러나 가끔씩은 아주 가끔 어쩌다 밤에 술에 취하면 그때의 억울했던 심정을 꺼내곤 했다. 그러다 잠이 들어 아침에 깨어나면 언제나처럼 항상 밝았다. 나는 그를 볼 때마다 느닷없이 남난희를 생각한다. 

    1993년 대한산악연맹의 에베레스트 여성원정대. 훈련대장과 정찰대장을 맡았던 자타가 공인하는 실력파 남난희는 사소한 문제로 집행부에 반발했다고 본 원정대에서 탈락됐다. 

    원정은 성공했지만 그 뒤안길에서 분함과 창피함으로 가슴앓이를 했을 것이 분명한 남난희. 우리는 혹 양지의 사람 기억하기에 바빠 음지는 미처 생각 못하는 것은 아닐까?

    여행가로 거듭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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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방보체의 한 롯지에서 휴식을 취하는 김인섭.

    1978년도 봄, 북극원정대가 한창 준비에 바쁠 때, 그 반대로 그가 한가했을 때 뜻밖에 초청장이 날아왔다. 대만의 건행등산회(健行登山會CTMA)에서 강의를 부탁하는 편지와 함께. 

    망설임 없이 후배 허정식과 임윤영을 데리고 대만으로 향했다. 기륭해안절벽에서 암벽등반을 1주일간 지도하고 귀국했다. CTMA에선 이듬해 겨울등산교육도 부탁했다. 그는 새로운 도전의 삶을 결심한다. 

    실망의 연속인 우리 산악계를 떠나 미지의 땅 네팔에서 살아가기로. 사업체인 설산장과 공장들을 하나하나 정리했다. 한국등산학교 설립위원 강사도 조용히 물러났다. 1979년 대만옥산에서 설상훈련교육 등 15일을 보낸 후 홀로 네팔로 향한다.

    새로운 삶. 미지의 세계 그곳에는 산사나이 마음의 고향처럼 히말라야 설산(雪山)과 후한 네팔사람의 인심이 있었다. 낯설지만 무역업을 시작했다. 주로 한국의 등산제품, 생필품 등을 많이 팔았다. 에델바이스 양말의 경우 2만 켤레를 부탄왕국에 공급하기도 했다. 

    수입도 쏠쏠했다. 한편 한국일보에서는 그에게 네팔주재 기자증을 교부해 줬다. 네팔 주재기자로서 그의 글이 가끔씩 ‘한국일보’와 ‘일간스포츠’에 실렸다. 1981년 아내와 아들딸을 네팔로 불러 큼직한 집을 구했다.

    한 가족이 오순도순 살며, 한국 원정대를 위한 네팔정부의 서류수속을 대행해 주고 편한 잠자리와 음식을 제공해 줄 게스트하우스를 운영하며, 시간만 있으면 배낭을 꾸려 발걸음 닿는 곳 어디나 높은 설산 트래킹 코스를 많이도 탐방했다.

    그의 뜨거운 열정은 바람결 따라 히말라야자락 곳곳을 누볐다. 버스 타고 몇 시간이면 인도 국경을 넘을 수 있기에 수시로 수천 년 된 고대유적들을 보러 다녔다. 

    네팔어()는 트리부반 국립대학교의 국어교수로부터 직접 배웠다. 그래서 그는 고급 네팔어를 구사한다. 아직 갈 곳이 많이 남았지만 아이들 교육 때문에 결국 6년간의 네팔생활을 접고 귀국을 결심한다.

    1984년 귀국하니 화가, 사진작가, 수필가 등을 비롯해 인도와 히말라야에 호기심 많은 일부 개인과 단체가 종종 안내를 부탁하곤 했다. 산악인은 없었다.

    삶의 새로운 화두가 결정되는 순간이다. 그렇게 시작해 안내를 하거나 혼자 훌쩍 떠나 세상을 마음껏 훨훨 날아다닌 지 어언 30년이 흘렀다. 인도와 네팔 전역을 샅샅이 훑었다. 

    네팔의 경우 지금까지 180여회를 트레킹 했고 인도는 250여회를 탐사했다. 특히 인도는 북부 힌두문화권, 히말라야문화권, 중부 고대문화권, 남부 드라비다문화권 그리고 불교문화권 등 다섯 문화권으로 나눠 연구하며 여행했다. 

    그는 늘 공부한다. 타고난 낙천적 성격에 현지인과 현지어로 대화를 즐기며, 그들의 음식을 몇 달간 먹어도 전혀 탈이 없는 적응력 탁월한 체질을 갖췄으니 천생 산악인이며 여행자다. 인도와 네팔을 제2의 고향처럼 포근해한다.

    세상을 넓게 바라보는 ‘큰바위얼굴’

    중국 사마천의 사기(史記)에는 반드시 옳은 자가 출세하는 경우는 오히려 많지 않으며, 어느 분야건 먼저 앞선 자는 대부분 실패하고 욕과 비난의 대상이 된다고 써 있단다.

    꼭 그의 경우가 아닐까? 혹자는 축구에서 반발 빠르면 슈퍼스타, 한발 빠르면 오프사이드(offside) 반칙으로 볼을 빼앗긴다고 말한다. 꼭 그의 경우가 아닐까? 그는 등산의 여명시대에서 늘 앞서 나갔다. 

    록클라이밍, 등산교육, 장비제작, 에베레스트원정, 북극탐험, 네팔 게스트하우스 운영 등 그는 언제나 먼저 생각했고 또 과감히 실행에 옮겼다. 그런데 왜 옛 산악인 중 일부는 그의 능력을 인정하면서도 결국은 실패한 루저(loser)라고 생각했을까? 모두가 성숙치 못할 때였다.

    그가 산악계를 떠난 지 어느덧 30여년. 그 긴 세월의 물결을 타고 5대양 6대주를 거침없이 많이도 돌아다녔다. 그는 타고난 강한 체력의 소유자다.

    칠순이 넘은 지금도 매년 몇 번씩 5,000미터의 높은 설산 자락을 흥얼거리고 걷거나, 꽁꽁 숨어 있는 깊숙한 곳을 물어물어 찾아가다 보면 어느새 나이는 어디론가 날아가 버리고 몸과 마음은 즐거움의 연속이다. 

    그 높은 곳에도 그 깊은 곳에도 옛 인류유산은 숨어 있었고, 남루하지만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권하는 형제 같은 원주민들의 냉수 한잔은 보람과 기쁨으로 충만했다.

    높이보단 넓게 세상을 바라보며 오늘도 여유만만 느긋한 그의 미소를 볼 때면 문득 다니엘 호돈의 [큰 바위 얼굴]이 오버랩 되곤 한다. 과거에 앞서가는 그를 이유 없이 시기 질투하여 루저라고 단정했던 일부 산악인들. 오늘날 다시금 되돌아볼 때 그가 과연 루저였을까?

     
    김병준
    대한산악연맹 자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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