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과 

에코클럽과 함께  등반

김근원의 사진증언

나의 사진 활동에 가장 많은 도움을 준 산악모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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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코 창립 30주년 기념전시회를 준비하며 모인 에코 회원들. (1989년 2월 도봉산장 부근에서)

지금까지 나의 등산활동을 돌이켜 보면 산악운동만큼은 혼자서 즐길 수 있는 운동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여러 사람들과 합심하여 힘을 모으고 또 뜻을 함께해야 긍정적인 결과를 얻을 수 있음이다. 어떤 위험에 처했을 때, 아니면 예기치 못한 어려움에 봉착했을 때 무난히 그 상황을 이겨내기 위해서는 혼자보다는 두 세 사람만 있어도 위기를 넘길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인원이 많다고 해서 결코 안전했던 것은 아니지만 활동반경을 조금이라도 넓히기 위해서는 혼자보다는 단체의 힘이 더 유효했다고 생각된다. 특히 우리나라 등산환경은 우리 특유의 역사적 환경과 더불어 기상조건 등 너무나도 밀접한 장애요인들이 함축돼 있어, 산행자체가 힘들고 어려웠음을 아마도 많이 느꼈을 것이다. 그래서 산악회라는 모임이 필요했고 산악회 내에서 조직적으로 움직여야 보다 효율적인 산행을 할 수 있었다.

산악회와 클라이밍 클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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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인봉 측면의 직벽코스를 개척할 당시 볼트 하켄을 박고 있는 유창서. (1963년 도봉산에서)

50년대와 60년대 초만 해도 산악회라는 명칭과 클럽이라는 이름은 성격상 약간의 구분을 주던 때였다. 즉 한국산악회라는 대명제 아래 각 단위산악모임들은 클럽이라는 호칭을 사용했고 규모도 소규모로 운영되었다. 주로 젊은 사람들이 주축이 되었고 서울 주변의 암벽에서 이모저모의 모험심을 기르며 움직이다가 점차 암벽실력이 좋아지면 인수봉이나 선인봉에서 기량을 뽐내기 시작할 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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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인봉 직벽 코스를 개척할 당시 사용된 암벽장비들. 가장 오른쪽에 놓인 햄머에는 「CASIN」이라고 찍힌 화인(火印)이 희미하게 보인다. (1963년 도봉산에서)

대개의 경우 학연과 지연 등으로 얽힌 고등학교 산악부나 대학산악부 출신들이 OB회 형식의 모임으로 모이기도 했지만, 그와 별도로 각기의 열정이 넘쳐 의기투합된 사람들끼리 별도의 모임을 결성하기도 했다. 

그래야 열악한 환경이었지만 등반 시 필요했던 자일도 함께 사용할 수 있었고 여타 암벽장비를 서로 활용할 수 있음이다. 그렇게 해서 생긴 모임이 하켄에코클럽, 슈타인만에코클럽, 그리고 라테르네에코클럽 등등이었다. 그 임시에 에코클럽(1957년 창립)도 생겨나게 되었다.

나는 우연한 기회로 에코와 인연을 맺게 되었다. 우연하다고 하지만 거의 필연이나 다름없었다. 전에도 언급했지만 1954년 백운대에서 유창서를 처음 만나고 2년 후 울릉도를 향하는 함정에서 느닷없이 반가운 재회를 하면서 급격하게 가까워졌다.

그러나 그때만 해도 나는 그에 앞선 전담과 최영식, 그리고 조장희 등과 함께 슈타인만에코클럽에서 활동했는데 그 멤버들이 하나 둘씩 외국 유학길에 오르면서 모임이 점차 시들해지고 말았다. 

그 무렵 유창서와 몇몇 젊은 사람들이 에코클럽을 결성했다는 말을 듣게 되었고 나도 자연스레 그들과 산행을 함께 하게 되었다. 아마도 본격적으로 합류하게 된 것이 50년대 말이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에코클럽과 맺어진 인연

초창기 에코의 회원들은 매주 주말 도봉산에 모여 캠프를 하고 등반을 하던 때였기 때문에 나도 늘 그들과 함께 하면서 여러 가지 다양한 암벽 사진을 찍을 수 있었다. 그런데 산행이 없는 평일에는 시내 다방에서 만나기도 했지만 우리 집에서도 모임을 가졌다. 내가 종로에 살 때는 꽤 자주 모였다. 그러다 지금 살고 있는 용산으로 이사하면서는 조금 뜸한 듯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유창서가 인근의 마포로 이사를 왔다고 하면서부터는 거의 매일 우리 집으로 고무신 - 운동화도 아님 - 신고 찾아왔다. 그러더니 에코의 회원들도 틈만 나면 먹을 것을 사들고 우리 집으로 모였고 우리 집은 에코 회원들 뿐만 아니라 이희성, 윤두선, 안종남 등 모든 산사나이들의 본부가 되었다.

에코 회원들은 나보다 물론 나이가 한참 아래였다. 그렇게 술 좋아하고 줄담배를 피우는 그들이었지만, 술도 못하고 담배도 안 피는 나를 좋아했던 것도 신기한 일이었다. 우리 집에 오면 다른 것은 없어도 커피는 항상 맛있게 끓여주니까 그런지 우리 집 오기를 즐겨했다.

나는 배운 것도 없고 아는 것도 없는 사람이었는데…. 더군다나 변변한 도움마저도 준 적이 없었는데도 그들은 “김 선생님, 김 선생님”하면서 나를 무슨 큰 형님이나 대하듯 무척이나 따랐다.

내가 아파서 병원에 입원한 적이 몇 차례 있었다. 그럴 때마다 나의 간호를 그들이 도맡아했다. 거의 작전을 짜듯이 오늘은 누가 오고 내일은 아무개가 온다는 식으로 순서를 정해서 내 옆을 지키곤 했다. 60년대 초, 동대문에 있는 이대병원에 입원했을 때는 버너와 코펠을 들고 와서 커피를 끓여주기도 했는데 그것 때문에 의사에게 걸려 혼이 난 적도 있었다. 

그 후 60년대 말에는 명동 성모병원에 입원한 적이 있었는데 그때도 역시 간호를 도맡아했다. 그곳에서는 아예 보온병에 커피를 담아 와서 나눠 마시고는 간호사들에게 커피를 한잔씩 주니까 그네들까지 나의 입원실에 놀러오기도 했다.

나와 에코의 관계를 말하자면 한이 없지만 이런 일도 있었다. 내가 설악산에 갔을 때 마침 유창서도 동행을 했다. 백담산장에서 마등령을 올라가야 하는데 필름이 거의 다 떨어졌다. 다시 서울로 갈수도 없고 걱정을 하니까 유창서가 용대리로 내려가서는 에코 후배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리고는 “김 선생님 방 캐비넷 오른쪽 서랍에 필름이 있으니까 몇 개 갖고 오라”는 전화를 했다.

나는 멋도 모르고 마등령에 올라갔는데 그곳에 유창서와 방충식이 느닷없이 나타났다. 바로 필름을 들고 나타난 것이다. 그때만 해도 방충식은 성질 고약하기로 에코에 소문이 자자했던 사람이었다. 그런데도 유창서 말이라면 꼼짝 못하고 따라했으니 내가 나쁜 사람인지 유창서가 더 나쁜 사람인지는 두고두고 해결이 안 되는 문제였다. 어쨌든 그 일만큼은 고맙기 그지없었다.

에코클럽의 활동들

                                                
                                                 선인봉 측면의 에코코스를 우리나라 최초의 아티피셜 방식 으로 오르고 있는 모습.
                                          선등이 유창서이고 밑에서 문규열이 확 보를 하며 함께 올라가고 있다. (1963년 도봉산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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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인봉 등반을 마치고 하강을 위해 자일을 정리하는 모습.
                                                    왼쪽부터 유창서, 송영희, 김진수, 백관식. 송영희는 본래 펜싱선수였는데
                                                    우리나라 최초 의 여성 클라이머로도 손꼽히고 있다. (1963년 도봉산에
서)


63년도에 선인봉 측면을 유창서가 개척할 때 나는 그 모든 장면을 다 사진으로 찍었다. 그때 등반장비도 그렇지만 사진장비도 그랬다. 광각렌즈만 있었으면 더 좋은 사진을 찍을 수 있었는데 그 어려운 과정에서도 좋은 사진을 남길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의 협조가 더 컸음이다. 또 나에게 중요한 기억은 67년의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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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봉 K크랙을 오르고 있는 유기수. 이 사진으로 김근원은 67년도 일본산악사진협회의 해외사진가 상을 수상했다. (1966년 도봉산에서)

당시 젊은 클라이머로 각광을 받던 유기수에게 주봉 K크랙을 오르게 했다. 나는 좀 더 극적인 모습을 위해 여러 동작을 주문했고, 그의 우직한 힘은 나의 까다로운 요청을 잘 소화해 내었다. 그때 찍은 사진을 일본산악사진협회에 기고했더니 해외산악사진 부문으로 나를 선정해 덕분에 입상의 기쁨도 갖게 되었다.

                                     
                              당시로서는 가장 험난한 코스로 불렸던 주봉 오버행을 유기수가 선등으로 오르고 있다. (1966년 도봉산에서)


                                       

                                           유기수가 주봉 오버행의 마지막 피치를 통과하는 모습. 멀리 만장봉이 보인다. (1966년 도봉산에서)





에코클럽의 활동들은 분명 우리 산악계의 화두임에 틀림없다. 초창기에는 암벽의 코스를 개척하는 일들로 활약하다가 차츰 겨울 빙벽으로 그 무대를 넓혔다. 그러기에는 여러 사람의 도움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대관령에 ‘오수도리’라는 산장이 있었다. 스키의 본 고장 오스트리아를 일본식으로 불렀던 이름이었지만 그 산장의 주인이 채수흥씨였다.

그는 본래 일본 우에노(上野) 음악학교를 나온 성악가였는데 산과 스키를 좋아해 에코와 깊은 인연을 갖고 있었다. 그런 연유로 당시로서는 구할 수도 없는 각종 등반장비들을 자신의 동생 중에 재일교포로 있는 채수인씨에게 부탁했고, 그런 형의 부탁을 받아 그가 한국에 올 때마다 장비를 갖고 와서 에코클럽에 기증했다. 그러니 당시만 해도 서울 장안에서는 화려한 등반장비를 사용하며 열성을 보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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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왕성 폭포의 빙벽등반을 위해 비룡폭포를 직등하고 있는 에코 회원들. (1969년 1월 설악산에서)



                                      

                                                    에코클럽은 본격적인 빙벽등반을 위한 훈련을 설악산에서 한 적이 있었다.
                                              잠시 얼음으로 뒤덮인 폭포를 바라보고 있는 훈련대원들. (1965년 1월 설악산 십이탕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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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음이 얼은 그 위에 눈까지 덮여있는 폭포를 등반하는 모습. (1965년 1월 설악산 십이탕에서)

에코클럽은 69년도에 국내 처음으로 토왕성 빙벽을 시도했다. 당시 열악한 장비와 기술로는 엄두도 못내는 일이었지만 그래도 그들은 그곳에 접근하며 가능성을 확인하였다. 그이후로 국내에 토왕성 빙벽등반의 새바람을 불러일으키는 계기가 되었음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매우 안타깝고 가슴 아픈 것은 그때 참여했던 김종철이 바로 설악산 눈사태의 십동지 중 한 사람으로 세상을 떠난 일이다. 그 가슴 아픈 일은 다음 기회에 다시 쓰기로 한다. 어쨌든 에코클럽은 나에게 너무나 소중한 산악인들의 모임이었다. 그들이 있었기에 오늘날의 내가 산악사진가라는 이름을 남길 수 있음에 감사하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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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최초로 시도 된 토왕성 폭포의 하단 등반 모습. 당시의 열악한 장비로 시도 했던 무모함이었지만 그 이후 우리나라 토왕성 빙벽은 새로운 바람을 일으키는 계기가 되었다. (1969년 1월 설악산 토왕성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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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코클럽의 고문이자 후원자였던 채수흥씨(왼쪽에서 두 번째)와 그 동생 채수인(뒷줄 맨 오른쪽)씨가 일본산악인들과 함께 내한하여 에코클럽과 함께 암벽등반도 했다. (1965년 도봉산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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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왕성 폭포 등반을 위해 참가했던 대원들. 사진 왼쪽부터 정연규, 이상학, 이일영, 유창서, 김종철. (1969년 1월 설악산에서)

원로산악인 모임을 주도한 에코클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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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산요수 비의 설치를 끝내고 찍은 기념사진. 현정웅, 오운소, 이원의, 김진수(좌로부터). (1966년 10월 대청봉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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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회의장을 지냈던 한솔 이효상씨가 휘호로 남긴 요산요수(樂山樂水) 비()를 에코클럽 회원들이 설악산 정상에 설치하는 모습. 이효상씨는 대한산악연맹을 설립하는데 많은 기여를 했다. (1966년 10월 대청봉 정상에서)

나의 노년에 내가 늙어간 만큼 에코의 후배들도 나이를 먹었다. 그네들도 옛날처럼 화려한 암벽등반을 할 수도 없을 만큼 세월이 흘렀다. 그래도 그들은 끊임없는 산악활동으로 귀감(龜鑑)이 되었다. 바로 원로산악인들을 위한 초청행사였다. 설악산에 홍종인 회장을 비롯하여 원로산악인들을 초청하고는 돼지바베큐 파티를 열어 원로들을 깍듯하게 대접했다. 나도 원로 축에 들어 얻어먹는 사람이 되었다.

언젠가 도봉산에서 초청행사를 할 때는 내가 몸이 아파 조금 늦게 그 행사에 참석을 했다. 못 올 줄 알았던 나를 보자마자 에코와 더불어 많은 산악인들이 나를 부둥켜안으며 좋아하더니 급기야 나를 번쩍 들어 의자에 앉혀주며 ‘할배 왔다’고 떠들면서 반겨주었다. 그러면서 한다는 말이 “김 선생님 안오시면 집에 쳐들어갈라고 했습니다”하며 겁을 주기도 했다.

(* 이 글은 평소 김근원 선생이 했던 말을 기억으로 되담아 아들의 글로 남기는 것입니다. 더불어 에코클럽 형님들에게 가족을 대표해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SERIES|이 기사가 담긴 시리즈 (1)

사진
 
김근원
글, 사진 정리
 
김상훈(사진가)


Posted by wasillao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