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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근원작가의 산에서 만난 인연들
    산 이야기 2015. 12. 3. 18:44







    사람과  - 2015년 12월

    산에서 만난 인연들

    김근원 사진 증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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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시의 교통 여건으로는 도봉산을 가기가 그나마 수월했다. 정인호 선생(오른쪽에서 두 번째)은 기념촬영을 할 때면 늘 한국산악회 회기를 꺼내 함께 촬영에 임했다. 오른쪽의 첫 번째는 역시 한국산악회 회원인 지정현씨.(54년 11월, 도봉산 망월사에서)

    멋진 인간관계로 평생을 함께 한 산친구들

    내가 산을 만나게 된 것은 정말 특이한 인연이었다. 세상 살면서 흔하게 보였던 주위 산들이 나의 처절한 상황과 맞물려 시야에 들어온 것 자체가 우연이었다.

    잠시 어렷을 적으로 이야기를 돌리면 내가 태어난 곳은 경남 진주였다. 그런데 그 고향땅을 야반도주하듯 떠난 것이 중학교도 제대로 마치지 못한 시절이었다. 

    그 무렵 형님이 호주 선교사 업무를 봐준 것이 화근이 되어 진주경찰서로 붙잡혀 갔고 무시무시한 일본 고등계 형사들의 문초를 받으면서 시작된 일이었다.

    마침 경남 도경에 진주고보 출신의 형사반장이 직접 조사를 하면서 “오늘 밤 안으로 경남을 떠나야 너도 살고 나도 산다”고 하면서 풀어 주어 그날 밤에 형님과 나는 진주를 뛰다시피 도망쳐 서울로 올라온 것이다.

    소년기에 이렇게 험한 세월을 보내다가 해방을 맞아 좀 행복하게 사는가 했더니 6.25전쟁이 터졌다. 부산으로 피난을 갔다가 종로의 우리 집에 다시 돌아왔으나 모든 것이 잿더미로 변해 있었다. 

    생활 터전을 한꺼번에 잃은 나는 허탈함으로 털썩 주저앉고 말았는데 문득 북한산이 내 시야에 들어왔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곳은 보현봉이었다.

    권금성 털보 유창서와의 첫 인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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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북한산에서 처음 만난 유창서. 당시 배재고등학교 1학년이었다.(54년 9월, 북한산 백운대에서)

    배낭에 카메라를 넣고 발걸음을 산으로 향했다. 효자동에서 출발하여 대남문을 거쳐 지금의 용암샘터를 지나 노적봉 부근까지 갔다. 그곳에서 길을 몰라 망설일 즈음 어떤 학생이 내려오길래 백운대 길을 물어 보았다. 

    그가 자신이 내려오던 길로 올라가라고 해서 갔는데 잠시 후에 보니까 아까 그 학생이 다시 내 뒤에 나타났다. 나는 놀라 무슨 일이냐고 하니까 걱정이 돼서 되돌아왔다고 하면서 함께 백운대를 올랐다. 

    당시 학생은 배재고등학교 1학년이었다. 고마운 마음에 그 학생의 사진을 찍어 주었다. 그때가 1954년 가을이었고 학생의 이름은 유창서라 했다.

    그후 1956년 나는 한국산악회가 시행한 울릉도 등반에 참여했다. 울릉도를 향하는 해군 함정에서 그때의 학생을 또 만났다. 고등학교 3학년의 학생이었지만 어엿한 청년이 되었고 산골 논에 모심기라도 한 것처럼 턱에는 수염도 듬성듬성 났다. 

    바로 권금성 산장의 털보였던 유창서를 그렇게 만나면서 평생의 인연이 되었다. 그는 나를 친형제보다도 더 따뜻하게 대해 주었고 나의 산사진 촬영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 겨울 설악산을 찍기 위해 봉화대에 올라 촬영을 할 때면 직접 커피를 끓여 보온병에 담아 들고 올라와 나의 언 몸을 녹여 주기까지 했다.

    산은 나에게 많은 사람을 알게 해주었다. 고향을 떠나 친구도 없이 외로운 청년기를 보냈는데 산에서 만난 사람들이 어떻게 평생을 함께 하게 되었는지 그 자체가 고마운 일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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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인호 선생과 함께 도봉산을 올랐을 때 관음암까지 갔다. 전쟁의 후유증이었는지 관음암이 텅 빈 채로 형편없이 되었던 시절이다. 앞줄 가운데가 정인호 선생이고 맨뒷줄 오른쪽이 역시 한국산악회 회원인 지정현씨.(54년 11월, 도봉산 관음암에서)

    처음에는 주로 정인호 선생과 함께 산을 다녔다. 정인호 선생은 이름 그대로 호인이었고 산악회 관리업무는 으레 그가 도맡다시피 했다. 

    그는 한국산악회 회원임을 명예 그 자체로 삼았다. 늘 배낭에 산악회 회기를 넣고 다니다가 기념사진을 찍을라치면 회기를 꺼내들고 촬영에 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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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담과 함께 설악산 천불동 스키등반을 했을 때, 등반을 마치고 신흥사에서 마지막 기념촬영을 했다. 함께 촬영에 임했던 박찬웅, 고재경, 최영식 등 모두가 산을 통해서 알게 된 사람들이었다.(58년 1월, 설악산 신흥사에서)

    그러다가 자연스레 전담과 윤상근을 산에서 만나게 되었다. 모두 젊은 청년들이었고 암벽등반을 한다고 어깨에 자일을 걸머매고 다녔던 사람들이다. 전담은 당시 암벽등반과 산악스키에 최고의 기량을 겸비한 산악인이었다. 

    전담이 나에게 함께 암벽등반도 하면서 사진을 찍어 달라고 하여 금방 어울리게 되었고 급기야 58년에는 함께 설악산을 스키로 등반하기까지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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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상근은 그의 경기중학교 후배들과 함께 산행하기를 좋아했다. 그럴 때마다 나와 동행을 원해 따라나섰고 자연스레 사진도 찍어 주었다. 당시 경기중학 3학년 학생들의 밝고 환한 모습이 보기에도 참 좋았다.(57년 여름, 도봉산 원통암에서)

    윤상근은 경기중학을 졸업하고 명석한 두뇌로 등산장비 개발에 몰두했던 사람이었다. 그에게 우이암 등반모습을 사진으로 만들어 주니까 얼마나 좋았던지 그 사진을 품에 안고 다니면서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자랑을 했다. 그것이 계기가 되어 조선일보에 근무하던 홍종인 당시 한국산악회 회장이 울릉도 등반에 참여하여 사진을 찍으라는 제의를 받게 되었다.

    울릉도를 향한 함정에서 만난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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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정태 선생이 서울시 문화상을 수상하고 찍은 기념사진. 그 날 참석했던 사람들 모두는 김정태 선생을 진정으로 좋아하며 존경했던 사람들이다.(62년 12월, 당시 서울시민회관 앞에서)

    울릉도는 작은 섬일지 몰라도 나에게는 크나큰 계기를 안겨준 섬이었다. 그 섬을 향해 가는 해군 함정 안에서 많은 사람을 알았기 때문이다. 

    평생의 친구였던 윤두선을 만났고 이희성과 안종남, 그리고 이숭녕 박사와 김정태 선생 등등. 모두가 산에 관한한 진지한 사람들이었다. 무엇보다도 김정태 선생은 내게 산 사진의 여러가지 조언을 아끼지 않던 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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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두선은 홍종인 회장과 함께 구례 곡우제 참관을 위해 화엄사를 찾았다가 노고단까지 등반 후 천은사로 하산했다. 사진에서 보듯 윤두선은 카메라 앞에서 늘 정중한 자세로 촬영에 응했다. 이런 점은 요즘 사람들도 배워야 할 자세가 아닌가 싶다.(57년 4월, 지리산 천은사에서)

    윤두선은 술과 담배를 전혀 안 하고 오직 커피만 마시는 모습이 나와 유사했고 부산 피난시절에는 늘 다니던 다방에 그도 자주 다녔다는데 묘하게도 서로 대면한 적이 없으니 신기한 일이었다. 

    그는 나와 키도 비슷했지만 참 해박하고 멋있는 사람이었다. 당시 등산복이 귀했던 시절, 어디서 구했는지 티롤 모자와 등산화 등등 좋은 것만 챙겨 입고 다녔던 사람이었다. 

    젊은 시절 한때 승려로 보낸 적이 있어 비록 파계는 했어도 늘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는 습관이 승려와 다름이 없었다. 울릉도 저동에서 새벽 일출을 찍으려고 나섰는데 유일하게 혼자 일어나 텐트 주변을 서성이며 모델이 되어 준 것은 나의 큰 수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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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부령 흘리의 스키장(지금의 알프스 스키장이 들어서기 전)에서 대회를 지켜보며 서로 환담을 나누는 김정태 선생(왼쪽)과 신업재 회장.(72년 2월 진부형 흘리에서)

    산을 다니면서 할 일이 많아졌다. 암벽등반도 해야 되지만 스키를 익혀야 한다고 생각한 것도 그때부터였다. 그래서 무작정 스키대회가 열린다는 대관령으로 몸을 향했다. 그때가 1957년이었다. 

    대회본부가 있는 백산장으로 찾아갔다. 그곳에 모인 사람들 대부분이 한국산악회 회원들이지만 새로 알게 된 분이 신업재 회장이다. 부산 피난 시절부터 ‘부산의 멋쟁이’로 익히 그분의 존함을 알았고 몇 번 뵌 적이 있어도 인사를 나누지는 못했다. 

    그런데 그곳에서 만나니 반갑기도 했지만 오히려 나를 더 따뜻하게 대해 주셨다. 본래 산악인이셨으니 금방 가까워졌고 함께 산행도 하게 되었고 늘 겨울이면 스키장에서 만나 반가운 인사를 드렸다. 

    더 특별한 일은 홍종인 회장도 그렇지만 그 두 분의 아들들도 나를 깍뜻이 대해 주는 것이다. 오히려 내가 자기 아버님을 대하는 것보다 더 나를 깍듯하게 대해 주었으니 참 특이한 분들을 모시게 된 셈이었다. 신업재 회장과의 관계는 기회가 있으면 또 언급하겠다는 생각이다.

    늘 마음에 남았던 사람 중에 안종남과 양천종이 있었다. 안종남은 제천의 부유한 집에 살면서 넉넉한 살림 덕에 꽤 일찍 산을 다녔던 사람이었다.

    그는 윤두선과 달리 술과 담배를 유난히 즐겼고 어디서 났는지 파이프 담배를 물고 다니면서 폼을 잡았다. 이상하게 가산이 기울면서 미국으로 이민을 갔다. 그곳에서 자리를 잡고 잘 산다는 소식을 들었는데 먼저 세상을 떠나 매우 마음이 아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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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친구들이 평소 주중에는 내가 살던 집으로 자주 모여 음악감상도 하면서 커피도 마시고 환담을 나눴다. 왼쪽 앞이 유창서이고, 그 뒤로 동국대 산악부 창립에 큰 기여를 했던 임돈(동국대 직원), 한사람 건너 영문학자였던 김경호와 양천종(성악가)이 뭐가 그렇게 좋은지 환한 웃음으로 대화를 나누는 모습이다. 벽에 걸린 액자의 에델바이스는 앞서 10월에 김정태 선생과 설악산을 등반하며 채집한 것으로 지금까지 소장하고 있다.(58년 11월, 종로의 집에서)

    또한 양천종씨는 앞서 소개한 적이 있지만 성악가이자 중학교 음악교사로 재직하면서 스키도 즐겨 타는 정말 멋진 사람이었다. 그는 내가 살던 종로집에 자주 와서 함께 음악감상도 즐겼고 기분이 좋을 때는 노래도 한 곡씩 불러주어 나에게 큰 위로가 되었다. 

    그러던 그도 미국으로 이민을 갔다. 그에게 딸이 하나 있었는데 그 딸이 소아마비로 다리를 절었다. 딸을 얼마나 사랑했는지 미국 가면 고칠 수 있을 것이라는 말을 듣고 다니던 직장도 때려치고 미국 행을 결심했던 것이다. 

    처음에는 고생을 했는지 성대수술도 하면서 음악생활도 포기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런데 노년에는 그 사랑하는 딸의 도움이 컸다고 했다. 미국이라는 나라가 장애인에게는 모든 혜택과 배려가 잘 되어 있었고 특히 편견이 없어 직장생활도 적응을 잘해 생활도 넉넉하게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는 참 기쁘기 짝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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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산악회 식목행사에 나의 아들들을 데리고 가서 나무심기를 가르쳤다. 행사를 마치고 우이암 부근에서 도봉산을 배경으로 아들과 함께 윤두선, 김정태 선생, 그리고 양천종의 사진을 찍었다. (65년 4월 도봉산 우이암 부근에서)

    설악산 눈사태로 세상을 떠난 이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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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2년도 한국산악회 동계 지리산 등반에서 대장을 맡았던 이희성 등반대장. 평소에도 투철한 군인정신으로 꼼꼼하게 계획과 임무 완수에 철저했던 그는 폭풍우를 만나 등반이 힘든 상황에서도 밤늦도록 진행 일정을 살피며 정상 등정을 시도하여 등정에 성공했다. (62년 2월, 지리산 세석의 제4캠프에서)

    산친구 중에 정말 안타까운 사람은 이희성이었다. 그는 육군 장교로 중령까지 올랐고 나와 산행도 자주 했다. 인간성도 좋아 여러 사람들과도 폭넓은 교분을 가졌고 특히 한국산악회에는 군 장비를 대여해 훈련등반에 활용케 해서 큰 도움을 주기까지 했다. 

    그와의 추억은 뭐니뭐니해도 설악산을 올랐을 때다. 내설악에서 쌍폭(쌍룡폭포라고도 한다)을 처음 보고는 얼마나 좋아하던지 그 모습을 잊을 수가 없다. 마침 그때 그의 사촌동생인 김영기도 동행을 했을 때였다. 

    나의 전시회 때 그가 갑자기 나타나 “형님 저 김영깁니다”하면서 내 손을 잡길래 그를 붙잡고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이희성이 그렇게 좋아하던 설악산에서 눈사태로 세상을 뜨고 말았으니 참으로 안타깝고 아쉬웠다.

    나는 본래 말이 둔하고 모든 일에 소극적인 탓에 남 앞에 나서기를 싫어했다. 한국산악회에서도 그런 나를 잘 알고 나에게 아주 친근하게 대해 주었던 사람이 있었는가 하면 그런 나의 약점을 알고 이용해 먹으려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럴 때마다 나의 바람막이 되어 주었던 사람이 바로 이희성, 윤두선이었다. 그 다음으로 말많기로 유명한 윤상근이 나의 힘이 되었는데 이상하게도 그런 사람들이 모두 일찍 세상을 떠났다. 그나마 윤두선이 80년대까지 살면서 정신적 힘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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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에서 만난 사람들 중 가장 절친하게 지냈던 친구들. 뒷줄 왼쪽부터 조두현, 배형근, 그리고 앞줄 왼쪽의 두 번째인 고성환과 윤항구.(60년 5월 북한산 비봉에서)

    또다른 친구로는 배형근과 고성환, 윤항구와 조두현이 있었다. 배형근은 병원 검사실에 근무하면서 한국산악회 행사가 있을 때마다 의료 봉사를 아끼지 않던 사람이었다. 몸으로만 봉사하는 것이 아니라 병원의 약품까지 들고 와 외상환자가 발생하면 직접 치료도 해주었다. 

    고성환과 윤항구는 스키장에서도 자주 어울렸지만 서울 근교를 등산할 때면 늘 함께 해주었고 나의 전시회 때마다 도움을 주던 사람이었다. 조두현은 한국산악회 총무이사로 재직하면서 행사 정보도 잘 알려주고 또 한국산악회로 사진의뢰가 오면 늘 나에게 연결해 도움을 주었다.

    이외에도 노고단 산장에 있었던 함태식을 빼놓을 수가 없다. 지리산 촬영에 그가 없었으면 아마 지금과 같은 좋은 사진을 찍을 수도 없었을 것이다. 

    그는 70년대 초에 비록 늦게 알게 된 사이였지만 서로 존경하며 지냈다. 그가 늘 하는 말이 “나같은 사람이 김근원처럼 술 못먹는 사람을 알게 된 것은 크나큰 실수”라고까지 하며 주위 사람을 웃겼다.

    이렇게 좋은 사람들을 산이 연결통로가 되었으니 큰 축복이 아닐 수 없다. 전시회를 할 때마다 진심으로 축하하며 다음에는 또 어느 산을 할 것이냐고 물으며 격려해주던 사람들이었다. 

    비록 이름을 밝힐 수는 없지만 노년에 집사람이 중풍으로 눕게 되자 그 어려움을 듣고는 돈을 보내준 사람도 있었다. 모두 산에서 만나 함께 산행을 했던 기억만으로 도움을 준 사람들이니 감사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출처:사람과 산

    (이 글은 평소 김근원 선생이 했던 말을 기억으로 되담아 아들의 글로 남기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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